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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과 주택

장수마을의 생활 속 디자인

10월 5일에 진행했던 디자인비평전 "이야기와 이야기"의 자료집을 다시 보고 있는데,
전시회 준비에 참여했던 김영남 학생의 후기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처음 삼선동을 보았을 때 삭아버린 나무기둥, 부식되어 녹슨 대문들만 가득 보였다. 나무도 풀도 모두 너무나 낯설어서 버려진 장소처럼 보였다. 이렇게 사회경제적 모순이 극심하게 축적된 곳에 과연 디자인이 있을까 하는 얄팍한 시선만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삶이 이러어지는 곳에 어찌 디자인이 없을까? 하는 생각 끝에 삼선동에 다시 가고, 다시 걸었다. 몇 번의 걸음 끝에야 삼선동이 보였다. 그곳은 집과 마을을 스스로 가꾸고 그러한
자생적 노력을 통하여 자신을 가꾸고 있었다. 삶의 양식을포기하지 않는 지안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사회는 그들이 요구하는 이상적 삶의 모습을 강요하기 위해 이곳을 낡아버린 추억처럼 털어버려야 할 곳으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주입된 통념을 다시 한 번 불식 시켰던 것은 삼선동 장수마을을 걷다 마주친 어느 대문기둥의 문양이었다. 마름모꼴이 반복되는 단순한 회백색은 헐벗은 시멘트 기둥에 불과했던 그 집 대문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그 문양을 통해 자기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그를 통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사용자가 만드는 디자인이라는 생각하게 됐다. 위풍이 당당한 동네의 풍채 좋은 목재로 이루어진 높고 아름다운 대문 역시 디자인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그 주인이 즐기는 디자인이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만 강요하는 것은 나 이외의 타자를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 유토피아는 이 둘의 즐거움이 공존하는 곳 그곳의 장소성이 아닐까."

'아! 그랬지' 하는 생각에 마을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습니다.
그 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곳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가꾸고 보살핀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동안 부러운 시선으로 감상했던 충신동, 동피랑, 삼덕동 등 유명한 벽화마을들은 적지 않은 예산과 전문가들이 투입된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공적인 혜택도 누리지 못한 이곳 장수마을 주민들은 티 나지 않게 그야말로 소박하게 자신의 공간을 시나브로 디자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수마을은 사람이 살기에 낡고 불편합니다.
그러나 따뜻하고 투박한 손길이 있고, 켜켜이 쌓아온 세월의 흔적이 있습니다.
연출로는 결코 모방할 수 없기에 그냥 이대로 남겨두고 싶은 공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