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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과 주택

[네이버캐스트] 계단만으로 이루어진 동네 서울 삼선1동 장수길

2009년 7월 9일 네이버캐스트 아름다운 한국 골목비경 편에 소개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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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avercast.naver.com/geographic/alley/693

낙산공원에 서면 서울 성곽 너머로 대학로와 동대문이 한눈에 들어 온다. 멀리 종로와 남산타워도 바라보인다. 조망이 좋은 탓인지 저물 무렵이면 서울의 야경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고 이곳을 찾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낙산공원 정상에는 창신동과 혜화동 방면으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장이 있다. 출발시간이 되면 버스기사가 땡! 하고 벨을 울리는 모습이 정겹다. 정류장 앞에는 커피자판기도 ‘친절하게’ 마련되어 있다. 이곳이 삼선1동 골목길의 출발점이다. 삼선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혜화문 밖의 동소문동과 동선동, 삼선동 일대 들판을 삼선평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삼선1동 골목길은 크게 두 곳으로 나뉜다. 삼선공원길 시리즈와 장수길 시리즈인데 두 골목길 모두 깊이가 만만치 않다. 삼선공원길 시리즈는 다음 기회에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장수길 시리즈만 살펴본다. 낙산공원 앞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시작하는 것이 편하다.

 

 

 

전형적인 달동네 풍경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쪽은 창신성곽길로 뻗어 나가고 반대편으로 가면 장수8길에 접어든다. 장수8길은 장수길과 만나며 서울성 방면으로 ‘장수길 시리즈’를 펼쳐 보인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장수8길과 장수7길은 마을을 지그재그로 통과하는 전형적인 골목길이었지만 지금은 근린공원이 들어섰다. 길 이름만 남아있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은 다소 어수선하다. 현재 성곽 주변을 정리하기 위해 나무를 심는 작업이 한창이다. 포크레인과 작업사무실로 사용되는 컨테이너박스 등이 이곳저곳에 들어서 있다. 정류장 앞 공원에는 나무 계단과 쉼터,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바라보이는 마을이 삼선1동이다. 슬레이트 지붕과 붉은색 기와지붕, 전신줄이 어지럽게 얽혀있다. 마을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한성대. 멀리 동대문과 동소문동의 고층아파트촌이 펼쳐진다.

 

삼선1동에서 장수길이 자리한 위치는 산정상부 가까이다. 중간 부분과 아래쪽에는 삼선공원길과 욱구길 등이 펼쳐진다. 겉으로 보기에 장수길 시리즈의 얼개는 크게 복잡하지 않다. 장수길이 횡으로 길게 뻗어나가다 언덕 쪽으로 크게 휘어지며 장수2길과 만난다. 그리고 마을을 한 바퀴 감싸고 돌아나간다. 장수길에서 장수6, 장수5, 장수4길이 차례로 갈래를 치고 장수2길에서는 장수3길이 갈라진다. 장수길 지역은 산기슭에 만들어진 전형적인 달동네다. 급한 경사를 타고 마을이 만들어졌다. 집을 피하며, 그리고 집과 집을 연결하며 길이 뻗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그재그로 휘어지고 얽혀버렸다. 막다른 골목길도 많이 숨겨두고 있다. 골목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신기하게도 길이 이어진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 갈 정도의 틈이 나 있다. 말 그대로 길이 아니라 틈에 가깝다. 길은 때로 짓궂기도 하다. 이어질 것 같아 들어가 보면 막혀 있는 경우도 많다. 대문이 천연덕스럽게 버티고 있다. 들어왔다가 나오기를 수 차례 반복해야 한다. 계단도 부지기수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서너 걸음 가면 계단을 만날 정도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 장수길을 돌아보려면 땀으로 흠뻑 젖을 각오를 해야 한다. 두 세 시간 헤매다 보면 종아리가 뻐근해질 수도 있다.

 

 

좁지만 깊은 골목

장수길은 좁다. 휘휘 돌아보자면 3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장수길은 깊다. 골목마다 특징이 다르고 보여주는 풍경이 다르다. 천천히 음미하며 돌아볼 가치가 있다. 장수3길은 정상부의 장수2길과 뼈대길인 장수길 사이에 횡으로 놓여 마을을 아래 위로 정확하게 이등분한다. 하얀색 철제 난간이 설치된, 골목길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전형적인 발코니 공간이다. 이곳은 마을을 살펴보기에 적당하다. 마을을 아래 위로 이등분하는데 앞을 보면 다닥다닥 붙은 지붕과 세간을 내어놓은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 집의 전면이 날 것 그대로 드러난다. 빨래가 걸려 있고 옥상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다. 장수3길에 장수5길이 고리자(U) 모양으로 걸려있다. 장수5길은 색조 분위기가 활기차다. 새하얀 벽과 파란색을 벽을 가진 집이 어울려 있고, 곧 스러질 것 같은 낡은 건물이 위태롭게 서 있기도 하다. 외국의 어느 골목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장수4길 쪽은 분위기가 가족적이다. 길이 상대적으로 넓고 공터가 많은 탓인지 무더위가 물러가는 오후면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담소를 나누곤 한다. 장수4길 곳곳에는 평상이 놓여 있는데 저녁 무렵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장수3길과 장수5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재미있는 장면이 숨어 있다. 성 쪽에서 내려가다 보면 화분으로 뒤덮인 집이 보인다. 화분이 지붕과 마당, 대문 앞을 빼곡하게 뒤덮고 있어 온실처럼 보일 정도다. 문동현 할아버지의 댁이다. 장수길을 다니다 보면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장수길을 다니는 동안 화분을 정성 들여 가꾸는 문 할아버지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집에 있는 화분이 무려 2500여주라고 했다. 문 할아버지의 댁이 아니더라도 장수길 곳곳에는 유난히 화분이 많다. 벽을 따라서 커다란 화분이 내어져 있다. 골목과 골목, 계단과 계단이 만나는 교차로 공터 부분에는 어김없이 화분이 놓여 있다. 꽃이 심어진 것도 있고 고추며 상추, 대파 등 채소가 담긴 것도 있다.

 

장수길은 계단의 연속이다. 가파른 지형에 맞추고 집과 집 사이를 힘겹게 연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계단이 생겨나게 됐다. 계단은 힘차게 쭉 뻗어나가는 것도 있고 포물선을 그리며 길게 휘어지는 것도 있다. 90도로 급하게 꺾이는 계단, 지그재그로 흔들리며 나가는 계단도 많다. 두세 단의 짧은 것에서 얼추 30단이 넘는 긴 계단도 있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내리다 힘이 들면 평상에 앉아 잠시 쉬어가도 되고 화분 앞에 쪼그리고 앉아 땀을 식혀도 된다. 이것이 바로 장수길의 매력이다. ‘계단만으로 한 동네가 되다니/ 무릎만 남의 삶의/ 계단 끝마다 베고니아의 붉은 뜰이 위태롭게 뱃고동들을 받아먹고 있다/ (중략)/ 무엇인가 빠져나갈 것 많을 듯/ 가파름만으로도 한 생애가 된다는 것에 대해/ 돌멩이처럼 생각에 잠긴다.장수길 계단에 걸터앉아 장석남 시인의 ‘송학동 1’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목덜미의 땀을 씻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