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언론에소개된장수마을

[오마이뉴스] 대안개발의 비결은 '가난'이었네

2010년 1월 23일 오마이뉴스 기사입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05967&CMPT_CD=P0001


대안개발의 비결은 '가난'이었네
[용산참사 1주기 ⑥] 건설사들도 포기한 삼선4구역 장수마을의 개발계획
권박효원 (10zzung) 기자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어느새 1년. 지난해 말 극적으로 협상이 타결됐고 지난 9일 장례도 치렀지만, 서울 곳곳에 아직 '용산'이 있다. 3년째 철거사업이 진행 중인 상도동의 눈 덮인 산동네에도, 밀어붙이기식 개발에 항의하며 주민이 자살한 마포구 용강동에도, 우여곡절 끝에 이주협상을 타결해 뿔뿔이 동네를 떠나는 왕십리에도 있다. <오마이뉴스>는 참사 1주기를 맞아 수도권의 대표적인 철거 현장을 찾아보고 재개발정책의 대안도 고민해봤다. <편집자말>
  
서울시 성북고 삼선4구역 장수마을의 모습.
ⓒ 대안개발연구모임
대안개발
  
서울시 성북구 삼선4구역 장수마을 모습. 골목길 계단을 따라 화분이 아기자기하다.
ⓒ 대안개발연구모임
대안개발

 

서울성곽을 따라 나있는 구불구불 얽힌 계단 사이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대부분 40~50년 전에 '무작정 상경'한 이농민들이 빈 땅을 찾아 무허가로 지은 노후불량주택이다. 한 주소지 지번 안에 집이 2개씩 들어가서 자장면을 시킬 때도 '1번지 앞집'이라고 말해야 제대로 배달이 된다.

 

얼마 전 폭설이 내린 뒤 언론사에서 취재를 왔을 정도로 골목길은 폭이 좁고 경사가 가파르다. 미끄럼 방지를 위해 뿌려진 연탄재가 도시가스 없는 이 마을 사정을 보여준다. 이강제 주민대표는 "그래도 우리 동네가 눈은 제일 빨리 치웠다, 누가 말 안해도 집 앞을 청소한다"고 자랑했다.

 

어느 재개발 지역보다도 주거환경개선이 시급해 보이는 이곳은 서울시 성북구 삼선4구역. 주민들은 이 동네를 '장수마을'이라고 부른다. 이름에 걸맞게 주민들 대부분이 노인층이다. 빈곤층 독거노인도 많고, 자식들을 독립시킨 노인들도 많다. 워낙 집이 낡고 좁아 대가족이 생활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어떤 건설사도 이 지역을 개발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2004년 재개발 예정지역으로 지정됐을 때는 잠시 대형 건설사들이 기웃거렸지만 결국 포기하고 나갔다. 문화재보호구역인 데다 경사가 심한 구릉지라서, 용적률(평균 130%)과 층수(최고 5층 내외) 등에 제한이 많다. 개발이익이 나지 않는다.

 

"다른 재개발지역 부럽지만 어쩌겠냐"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대안적 실험이 가능하다. 지난 2008년부터 녹색사회연구소·성북주거복지센터·주거권운동네트워크·한국도시연구소 등이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단체들은 그동안 장수마을의 지형적 조건과 주민들의 욕구, 주거형태 등을 조사하고 대안개발모델을 연구했다.

 

2009년 12월 이들이 발표한 대안개발의 목표는 '정든 이웃과 함께 계속해서 살 수 있는 마을 만들기'다. 마을 주민들이 머물 주택을 정비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 주거환경을 개선한다. 더 나아가 주민공동시설도 확충하고, 역사문화적 공간으로 명품 골목길을 만든다.

 

이거 말은 다 좋은데 너무 장밋빛 아닐까? 이미 몇차례 재개발 계획이 무산되는 것을 지켜본 주민들도 이 청사진에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이강제 대표는 "과거에 (재개발 계획에) 속았던 경험이 있어서 자포자기한 주민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곳의 대안개발을 현행 제도로 보면 '거점확산형 주거환경개선사업'이다. 표현이 너무 어렵고 생소해 남의 나라 언어 같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지역내 거점을 정해 그곳 주택을 집중 정비한다는 것이다. 거점 밖에서는 주민들이 각자 필요와 경제적 여건에 따라 주택을 개보수한다.

 

  
서울시 성북구 삼선4구역 장수마을의 모습.
ⓒ 대안개발연구모임
대안개발

이 동네 화장실만 해도 아직도 정화조 시설이 부족하다. 그나마 80년대까지 주택 바깥에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이 많았다. 지붕은 비가 새고 조금씩 가라앉았다. 담장이나 벽이 갈라지고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가 철근이 드러난 집도 많다. 이 정도가 되면 단순히 보기 싫고 불편한 수준을 넘어 주민 안전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대안개발팀은 이런 집들을 정비해 다세대 주택이나 원룸형·기숙사형 등의 '도시형 생활주택'을 만들 계획이다. 이 중 40%는 공공임대주택(현행 의무건립비율은 20%)으로 짓는다. 또 경로당이나 관리사무소·어린이놀이터·공동부업작업장 등 주민복지시설도 만들 예정이다.

 

이같은 주택 유형은 1~2인 노인가구와 영세 가옥주가 높은 지역 사정을 감안한 것이다. 게다가 인근 한성대학교 학생들이 이곳 원룸에서 자취나 하숙을 하면 주민 소득에도 다소 도움이 될 수 있다.

 

집은 편안하게, 골목은 정감있게

 

거점지역 설치가 끝나면 도시기반시설을 정비한다. 가스관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지역의 오랜 숙원 하나가 해결되는 것이다. 겨울마다 높은 난방비로 몸살을 앓는 주민들은 "도시가스만 들어와도 살 만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한 4m 이상 규모의 도로를 새로 설치하거나 기존 도로 바닥을 수리하고, 경사가 심한 곳에 안전 손잡이를 설치한다. 노인과 장애인이 다니기에 안전한 길을 만들자는 것이다. 소방차가 못 들어오는 좁은 골목이 많기 때문에 곳곳에 소화전도 새로 설치해야 한다.

 

또하나 이 마을 대안개발의 중점사업은 '경관협정계획'이다. 서울 성곽을 따라 아기자기 골목길이 펼쳐지는 지역의 가치를 활용하자는 것이다.

 

사실 주민들에겐 가난의 풍경이지만, 외지인들에게 이곳은 서울에서 '동네'의 정취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골목이기도 하다. 주민들이 자연 지형에 맞춰 길과 계단을 내고 집을 짓다보니 개성이 강하다. 지붕에 정원을 만들어 야생화를 기르는 주민도 있다.

 

대안개발연구팀은 이같은 특성을 최대한 살릴 계획이다. 주택을 정비할 때 마을 경관과 어우러지도록 지나친 원색을 배제하고 천연자재를 사용한다. 불필요한 담장을 허물어 작은 정원을 가꾸고 이웃이나 방문객과 함께 마당을 공유한다. 골목에는 평상이나 의자를 놓아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한다.

 

이는 지역내 소득 및 일자리 창출과도 연결된다. 서울성곽과 인근 낙산공원·총무당 등 역사문화자원을 연결해 장수마을을 트레킹 코스로 만든다면, 이곳을 찾는 시민들에게 먹을거리나 기념품을 판매할 수 있다. 일부 주민들은 문화유산 안내자로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망해봐야 환상을 버린다"

 

장수마을의 대안개발이 복잡한 것은 주거환경개선사업과 서울시 경관협정, 한옥개보수 지원 등 다양한 주거 관련 제도가 조금씩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안적인 개발제도가 부재한 한국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다른 지역에 많이 적용되는 주택재개발 사업은 장수마을에서 추구하는 대안개발과는 거리가 가장 멀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도 처음부터 대안을 택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가시적 정비효과가 큰 아파트형 공동주택 방식에 호감을 보였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건축비용은 물론 토지사용료 변상금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대안개발계획대로 저렴주택을 짓거나 부분 개보수만 해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공공인 SH공사나 한국해비타트가 사업시행 및 시공에 참여하고 각종 지원을 받아야 개발이 가능한 상황이다.

 

지난해 대안개발모임이 만난 한 할머니는 "재개발하면 1억씩 내고 들어갈 수도 없고 여기서 나가는 거지"라고 잘라 말했다. 이강제 대표는 "(대규모 재개발을 하는) 다른 지역이 부럽지만 어쩌겠냐, 우리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적의 개발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시 성북구 삼선4구역 장수마을의 가파른 골목길. 공공미술가들이 이 곳에 주민 쉼터인 '쌈지공원'을 만들 예정이다.
ⓒ 대안개발연구모임
대안개발

그러나 이 가난한 동네에서도 집을 둘러싼 주민들의 이해관계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 대표는 "물과 기름"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래도 지역에 살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가옥주라면 재개발 이득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상황이다. 반면 변상금도 내기 힘든 영세 가옥주거나 세입자들은 도시기반시설이나 주거환경만 고쳐서 계속 거주하고 싶다는 바람이 크다.  

 

남철관 성북주거복지센터 사무국장은 "그나마 사업성이 없기 때문에 주민들이 대안개발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서울의 다른 지역에선 씨알도 안 먹힌다"고 말했다.

 

그는 "재개발사업이 한 번 완전히 망해야 주민들이 부동산 대박의 환상을 깰 수 있다"고 꼬집었다. 지금도 원주민 대다수가 보상 없이 쫓겨나가는 것이 재개발의 현실이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나는 절대 철거민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한 재개발제도 개선은 어림도 없다는 것이 지난 1년 반 대안개발 연구의 결론이다.

2010.01.23 10:45 ⓒ 2010 OhmyNews